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바 미사일 위기 (문단 편집) === 힘의 불균형 === >흐루쇼프의 말은 허풍이다. 우리에겐 제1격 능력[* First Strike Capability. 핵전략 및 국제정치학 용어로 단순히 먼저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선제공격을 가해 상대 핵보복 전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을 말한다.]이 없다. '''[[미합중국|당신들]]은 [[소련|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지만 [[소련|우리]]는 [[미합중국|당신들]]을 멸망시킬 수 없다.''' >---- >[[CIA]] 요원과 접선한 소련 [[GRU]] 장교 올레그 펜콥스키의 발언 1962년 당시 [[미군]]이 보유한 [[소련]]에 투발 가능한 핵전력은 '''미 본토에서만''' 탄도탄 200여 기에[* [[아틀라스 로켓|SM-65 아틀라스 ICBM]] '''144발''', [[SM-68 타이탄]]I ICBM 60발 수준이었고 [[미니트맨]]I ICBM도 실전배치 중이었다.] [[B-52]] 전략폭격기 555대[* 여기서 소련의 요격기와 방공망에 쉽게 격추당하지 않겠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는데 숫자도 워낙 많고 이들은 [[AGM-28 하운드독]] '''핵 공대지 초음속 미사일'''을 소련 방공망 바깥에서 투사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소련의 선제핵공격으로 폭격기 전력이 깡그리 날아가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Chrome Dome 작전으로 [[알래스카]]와 [[그린란드]], 그리고 [[지중해]] 상공에서 상시 전략초계하며 '''언제든지 소련에 핵불벼락을 끼얹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공군 소속 [[아브로 벌컨]] 전략폭격기들도 B-52 폭격기와 공동으로 전략초계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B-58]] 초음속 폭격기 116대였다.[* 미 해군 항모전단에서 이륙하는 [[A-5]] 초음속 핵폭격기와 [[A-3]] 핵폭격기까지 합한다면 '''장난아닌 숫자다!'''] 투발 가능한 전략핵탄두만 총 1,830기. 여기에 영국에는 PGM-17 토르 IRBM이 60여기가 배치되었고 PGM-19 주피터 MRBM은 [[이탈리아]]에 30여 기, [[튀르키예]]에는 15기가 배치되며 소련 영토를 사거리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전략초계 중인 [[조지 워싱턴급 잠수함]]들과 [[이튼 앨런급 잠수함]]들은 유사시 '''수십 발의 [[UGM-27 폴라리스]] SLBM 불벼락을 소련 전역에 퍼부어댈 수 있었다.'''[* 이들이 [[바렌츠 해]] 또는 [[지중해]]에서 발사할 경우 '''모스크바 정도는 손쉽게 사거리에 넣을 수 있었다.'''] [[소련군]]이 가진 건 '''66기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과 [[SLBM]]'''이었다.[* 소련은 [[R-7]] 10발과 [[R-16]] 50발을 가지고 있었고 RT-20P도 추가로 가지고 있었다.][* 당시 소련의 [[K-19]]에 탑재된 R-13 SLBM들은 사거리가 불과 '''600㎞'''로 미국의 폴라리스 SLBM보다 사거리가 짧았고 나토의 대잠망을 돌파해 미국 본토에 아주 가까이 접근해야 겨우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TU-95 전략폭격기[* 이것도 사실 미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에 활용될 수 있는 유의미한 전력으로 보기 힘든 게 미군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을 북극권과 캐나다 지역의 방공망을 보고도 비행으로 돌파하고 미국 본토에 핵공격을 실시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를 동원해도 차이가 커도 너무 커서 선제 핵공격을 통해 [[미국]]을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실제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소련은 얼마 안 되는 핵무기를 다 사용하고 나서는 미국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그냥 맞아줄 수 밖에 없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당시의 핵전력 비율은 17:1. 소련이 정말 운 좋게 미국에게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성공했다고 가정해도 당시 소련의 ICBM, SLBM 정확도를 고려했을 때 핵공격이나 대규모 공습을 상정하고 지어진 미국의 ICBM 사일로나 SLBM 기지, 지휘벙커들을 고작 핵무기 한 발로 무력화한다는 것은 진짜 하늘이 도와줘야 가능한 거고 일반적으로 타격대상 하나 당 핵탄두 여러 발을 할당해야 무력화할 수 있을지 고민이나 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ICBM과 SLBM[* 이것도 소련 해군 따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의 미국 해군 대잠망을 피해 미국 부근까지 진출했을 때나 활용 가능한 전력.]을 가지고 미국 본토의 핵전력을 하나하나 때리고 있다간 미국의 핵전력은 별 타격 없는데 소련 대륙간 탄도탄 전력이 먼저 나가떨어질 정도로 가성비가 안 나오는 일이었다. 소련이 그나마 노려 볼 수 있는 것은 미국 본토의 대도시를 날리는 거였는데 이마저도 쉬운 게 아니었다. 미국의 대도시권 밀집도는 [[대한민국]]의 그 미친 밀집도와 동일선상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스프롤 현상|북미 대륙 여기저기 드넓게 퍼져 있는 데다]] 콘크리트, 철골 건축물로 가득한 미국의 대도시에서 충분한 살상력을 내기 위해선 도시 하나당 핵무기 한 발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사실상 당시 소련의 핵전력 수준으로는 미국 본토의 대도시들을 타격해 미국의 전쟁수행능력 무력화를 노려 본다는 선택지마저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조건이 소련에게 절망적이었다. 특히 튀르키예와 이탈리아에 배치된 주피터 미사일은 '''[[모스크바]]를 사거리 안에 두고 있었다'''. 반면 소련으로선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 타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소련 정부와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니키타 흐루쇼프 이하 소련 지도부는 이러한 전략적 불균형 상황에서는 소련에게 무조건 항복과 저항 말고 그 어떠한 중간 선택지도 없다고 여겼고 미국에 대한 매우 도발적이고 공세적인 외교 전략으로 나가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John_Kennedy,_Nikita_Khrushchev_1961_0.jpg|width=100%]]}}} || || 1961년 6월 [[빈(오스트리아)|빈]] 임페리얼 호텔에서의 정상회담,[br][[니키타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의 만남 || 마침 새로 당선된 케네디를 애송이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그와의 첫 회담에서 그를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위협했고 소련의 미사일과 핵 공격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마치 한 판 붙을 것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이는 흐루쇼프가 아이젠하워와의 회담을 통해 미국 역시 핵전쟁을 두려워하므로 이를 빌미로 협박하면 물러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냉전 시기의 악감정이 섞인 서방의 잘못된 시각이며 소문이다.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함부로 다루려할 의도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이젠하워와 흐루쇼프 간의 외교 관계는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 군 감축과 같은 데탕트적 분위기와 금문도 - 마조도 포격 사건, 1958년 베를린 위기, 미국의 레바논 사태 개입, 소련의 미국 U-2 격추와 같은 충돌이 뒤섞여 있었다.] 한편 소련의 정보를 잘 알지 못했고 [[스푸트니크 쇼크]]와 [[차르 봄바]] 실험 이후 소련에 대한 공포로 미국은 정작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우월하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나온 표현으로 미사일 격차(Missile Gap)가 있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이 설마 소련 바깥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도발적인 전략을 취하진 않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미 소련이 동독에 준중거리 미사일과 핵탄두를 배치했던 전례를 볼 때 이는 터무니없이 안일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니키타 흐루쇼프는 즉흥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련 군부는 흐루쇼프의 핵만능주의와 미사일 올인 전략에 불만을 품었지만 미국에 대한 도발은 지지했고 [[소련군]] 총참모장 [[세르게이 비류조프]] [[육군]] [[원수(계급)|원수]]는 [[쿠바]]의 야자수 나무들로 핵미사일을 완벽히 숨길 수 있다는 보고까지 올렸다. 결국 소련은 쿠바에 5만 명의 [[육군]] 병력과 [[전략로켓군]] [[MRBM]] 기지, [[소련 해군|해군]] 기지 설치 계획을 승인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요약하면 50년대 말 실제 핵전력은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월했지만 소련은 스푸트니크 쇼크[* 당시 사용한 로켓의 계보는 역사상 가장 경제적인 우주발사체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군용으로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생산했고, 열병식에 공개도 했고 서방권은 믿었다. 코룔로프에게 우주개발비를 준 소련 군부의 목적은 이런 면에서 완벽하게 달성되었다.] + 가가린의 유인 우주비행 + 루나 탐사선의 달 명중과 같은 발사체 홍보효과 + [[차르 봄바]] 실험 성공 + 철의 장막으로 정보 은폐에 성공해 [[허장성세|소련이 미국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블러핑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와중에 소련은 뻥이 아니라 실제적인 타격능력을 가지기 위해 쿠바를 주목했고 안 그래도 [[전장의 안개(게임 용어)|자국이 전력상 동등 또는 열세라고 생각했던]] 미국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